8. –

지쳐있었다.

만화를 그리겠다 마음먹은 건 이대로 내가 바라지 않았던 삶을 남의 의지에 강요받으며 살다가 가고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부질없는 짓이었다 사무치게 후회할 날이 온다해도 해보고 싶었다.
기회는 실력보다 운이었다. 길의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몰라도 어쨌든 문이 열렸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내 삶에 상관해온 모든 손길들을 거부하면서 설 곳 또한 겁이 날만큼 줄어들었다.

연재는 내 독단으로 시작했고 처음부터 동의받지 못한 일이었다. 그건 언제 어느 때에든 남의 독단으로 끝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지난 9월, 시작이 현실이 되면서 끝도 현실이 될 자격을 갖춘 거나 다름없었다.
얼마간은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깊이 깊이 빠져들었다. 고통스럽고 기꺼웠다.
그런다고 현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잊은 척 할 뿐, 잊지 못했다. 지겹게 나를 옭아맸던 것들이 다시 침범해왔다.

있지도 않은 유예기간을 버는 심정으로 시간을 구걸하다시피 했다. 매일 매일이 끝과 같고 한 회 한 회가 고비였다.
계기를 되새기고 지난 과정을 넘어 끝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마음은 헛된 기대를 품다가 시들기를 반복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원고를 대하면 현실을 잊을 수 있었고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긋고 있는 선은 곧 끊어질 것이다. 그리는 시간과 그릴 수 없어질 시간이 분리되어있지 않다.
그리는 칸마다 긋는 선마다 출구없는 근심이 배여들었다.

더욱이 무수한 희생 위에 서서 오로지 나의 삶을 살기 위해 저버린 마음도 외면하기에 힘겨웠다.
꾸짖어 준 사람들의 염려를 배신하고 여전히 도망만 치면서 그런 주제에 자책하는 이중성이 꼴사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