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4)

지난해의 성과는 꾸준한 독서와 토지 모작이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아주 익숙하게 접한 책이지만 완독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던, 읽고 싶어서라기보다 내재한 불안에서 벗어날까 싶어 손에 잡은 책을 절반 가까이 읽었다.
토지는 3부 1권(9권)째다. 그렇게 읽고 싶어 했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재미 붙이기에 실패하다가 드디어 흐름을 탔다.
이 외에도 여러 소설, 만화, 웹툰을 읽었다. 전보다 폭넓게 웹툰이 가진 다양한 색을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어서 기쁘다.
모작은 와치 원고 전에 매일 30분씩 했다. 처음 얼마간은 잘 모르겠더니 다섯 달쯤 지나자 인체 중심 틀과 전체 구도를 잡는 감각이 조금 생겨서 원고에도 도움이 된다.

와치 시놉시스도 거의 매일 써서 분량이 꽤 쌓였다. 그릇별 시놉시스와 확장편은 서로 연결된 부분 때문에 서둘러 쓰기도 했다.

7년

세 달 사이에 머리카락이 꽤 길었다. 어깨에 닿을 만큼 기르기는 거의 십 년 만이다. 익숙하지 않고 거추장스럽기도 해서 뒷덜미를 자꾸 쓸어보게 된다.
몸무게는 4킬로 줄고 새치가 또 늘었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에 건선이 다시 번졌다. 신체 기능이 전체적으로 계속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심적으로도 힘에 부쳤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이 정도는 적당히 참아 넘길 만큼 덤덤해졌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 끄트머리에 마주한 공백은 작가로서 지나온 시간에 대한 슬럼프였다.
내가 결국은 미워한 스물다섯 이전의 삶이 그토록 바랐던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산 7년보다 나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날것의 모양대로 사는 나보다 주어지는 여러 모양으로 살았던 내가, 종종 숨 막혔던 그 삶이 적어도 방종한 인생보다는 쓸만하지 않았을까.
구제할 길 없이 거꾸러진 자리에서 나는 눈과 귀를 막고 가만히 시간만 흘려보냈다.

200

천지 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음으로 하여 생명이 존재한다고들 하고 탄생은 무덤에 박히는 새로운 팻말의 하나라고들 하고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집념은 율동이며 전개이며 결실이라고들 하고, 초목과 금수와 충류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들 한다.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잇는 그동안을 집념의 조화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뒤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 희극배우, 웃음 참는 비극배우의 일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 토지 1부 2권, 박경리

올가미

지난 몇 주가 올해의 최장 슬럼프 기간이었다. 이젤에 늘어놓은 원고는 꼴 보기 싫었고 펜도 잡고 싶지 않았다. 왜 이러고 사는지, 실패 이상의 결과가 있긴 할는지.
내장을 꺼내어 샅샅이 훑고 싶었다. 어긋난 뼈를 쳐서 붙이고 싶었다. 병에건 돈에건 무릎 꿇려서 그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 숨통이 막혀서는 잘못된 길로 향했었다 고백하게 될까.

내 그림에 갖는 확신은 언제나 얕고 약해서 걸핏하면 부서지고 흩어진다. 의구심은 발목에 걸린 느슨한 올가미다. 무난하게 넘기는 듯싶다가도 사소한 챔질 한 번에 끌려 올라간다.

방치

4월에 들어서고부터, 그러니까 정식 연재 논의를 스톱한 후로 새 회차 업데이트 공지 외엔 아무런 글도 쓰지 않았다. 써놓고 올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글쓰기 자체를 멈추었었다. 4월 한 달은 쓸 수 없어서 작업에만 매달렸고 5월 중순에는 후기를 시간순으로 나열은 했는데 감정이 과하게 느껴져서 방치했다.
술렁였던 마음을 글로 털어내지 못한 탓에 출력창이 막힌 듯 다른 일상글이 비집고 나올 틈이 없었다. 그림과 엮인 말들은 늘 씹고 씹어 삼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