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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부고를 받았을 땐 슬픔보다 충격이 훨씬 컸다. 한 음절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고 동시에 믿기지가 않았다.
울음을 터뜨렸다면 그건 위선이었을 테고 울지 않은 것은…

먹빛

올 상반기엔 다양하게 아팠다. 뜻밖에 알러지 반응이 올라온다거나 급체를 한다거나 약한 식중독 증세를 겪기도 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호흡 곤란도 몇 차례 있었다.

심적으로는 마침내 한계인가 싶은 지점에 다다랐는데, 나는 언젠가 그림을 그만두게 된다면 그 이유는 집에서 강제하거나 생활고로 무너지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생각했었다. 무력하게 바닥을 찍으면서 자포자기, 그런 예상이었다. 하지만 회복되지 않는 체력과 스스로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생활은 의외의 표적을 끌어냈다.
난생처음으로 그림 자체가 미워진 것이다. 이제껏 삶을 지탱해온 동력이 사그라드는 듯, 아주 끝장을 내려는 듯이. 냉엄한 현실이 바닥을 치기 전에 형편없는 내 바닥이 드러난 셈이다. 놀랍고, 두렵고 슬펐다. 극단적 충동으로 고생했을 때와 같이 어떤 형태로도 차마 이 마음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나는 안 되는 사람인 것을 그만 인정하고 전부 접어버리라며 종용하는 목소리, 익숙한 주장은 항상 과거의 실패를 근거로 든다. 부정하고자 할수록 자기 부정의 함정에 빠져 아등바등 맴을 돌게 된다. 등 배가 뒤집힌 벌레처럼.

칠월

이달부터 거의 생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침마다 한 시간씩, 시놉시스를 쓰는 날엔 삼십 분씩.
7월 6일, 피검사를 하고 CT와 엑스레이를 찍었다. 검사 결과는 전반적으로 괜찮았고 약을 처방받았다. 빈혈은 역시나, 피를 많이 흘려서 적혈구 크기가 작다고 한다.
7월 7일, 힘없이 가라앉아서 오전 이후로 쉬었다. 밤엔 좀 짜증스러운 문자를 받았다.

병원의 정적인 공기는 내리누르는 느낌으로, 침대 위에 누웠던 그 잠깐 사이에 밀려들던 단절감은 내가 얼마나 유약한 사람인지 돌아보게 했다.

그림자

어둠은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것이고 빛은 새로 태어난 것, 모양 있는 것이다. 그 둥그런 빛 아래라야 비로소 그림자는 진다.
태양을 마주하고 서면 자신의 뒤로 지는 그림자를 이따금 돌아보며 나아갈 뿐이지만, 태양을 등지고 서면 앞을 향해 걸어도 늘 자기 그림자에 매이게 된다.
나의 그림자가 더 검고 더 선명해짐은 나를 비추는 빛이 더 밝고 더 맑아진 까닭이다.

나무

최근 카더가든이란 가수를 알게 되었다. 스쳐 지나듯 본 명동콜링 라이브 영상에 끌렸고, 막 발을 담근 참이라 유명한 곡부터 시작했다. 나무, 꿈을 꿨어요, home sweet home, 파도, 밤새. 드라마 OST인 happy ending은 의외성이 있어서 좋다.
싱어송라이터에, 끄는 듯한 가창 방식이며 무엇보다 독보적인 음색이, 원래도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취향인데 시네마틱하기까지 해서 매료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다.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어깨에 닿을 만치, 그리 긴 길이도 아니었는데 근 십 년 가까이 시원하게 짧은 머리여서 그랬는지 유독 불편했다.

원래도 몸에 뭐가 거치적거리는 걸 싫어하긴 한다. 손목 발목을 조이는 옷이나 딱 맞는 정 사이즈의 옷은 물론이고 스킨로션도 피부 위에 한 겹을 덮는 느낌이라 답답하다. 핸드크림과 립밤은 무겁고 끈적거려서 더 그렇다. 춥고 건조한 겨울이면 손등이나 입술이 거칠거칠 갈라져서 아픈데도 그냥 참고 버팅길 정도다.

진도

원고 열네 장을 아등바등하려다 중간에 확 지쳐서 질질 끌 느낌이, 아니 강한 예감이 든다. 일단 밑그림은 24p까지 이어서 그리되 힘들 것 같으면 중간에 흐름이 끊어지더라도 20p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오늘의 진행 상황은 스케치가 24p, 밑그림이 17p, 밑선이 14p. 내일 15p 밑선을 끝내고 선 단계로 들어가서 다음 주엔 밑색을 시작하고 싶다.

팬케이크

팬케이크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가장 자주 만들어 먹는 음식이다.

볼에 계란 세 개를 풀어 휘핑기로 마구 저은 다음 우유 400밀리를 붓고 작은 거품에 표면이 덮이도록 또 젓는다. 팬케이크 믹스 500그램을 체에 거른다. 고운 가루를 내면 섞을 때 덩어리가 덜 진다.
팬을 달구고 버터를 녹인다. 동그랗게 퍼진 반죽 표면에 둥근 기포와 함께 달달한 향이 올라오면 뒤집어 준다. 중심부부터 가장자리까지 폭신하게 부풀고 테두리는 살짝 바삭한 정도가 좋다. 꿀이나 연유, 초코 시럽, 아이스크림을 올려도 좋지만 보통은 그냥 먹는다.
최근에는 차갑게 살짝 굳힌 반죽을 수저로 담뿍 떠 한 입 거리로 부치는데, 푸딩처럼 형태가 무너지지 않은 채 그대로 팬에 안착하는 걸 보면 기분이 나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