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 콘티

RECORD 1.2와 1.3이 유독 그림 콘티 단계에 애를 먹인다.

작년에 작업해 둔 분량과 새로운 내용을 취합,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흐름이 제한된 느낌을 받는 것, 창작 세계관으로 대사의 공백이 유독 많은 것이 아마 주된 원인이다.

와치와 빚은은 그야말로 전혀 다르다. 작품 색도 색이거니와, 와치의 인물이며 이야기가 독단적으로 제 갈길 갔던 걸 생각하면…
빚은의 경우 작자의 끈질긴 사고를 요구한다.

그런 차이 때문인지 재미있게도 와치를 연재한 경험은 빚은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더구나 기본기의 부재는 늘 나를 원점으로 돌려 놓는다.
 

별까지 걸어간다

인내의 범주에 가장 인접한 욕구는 책 구매욕이다.
책은 그림과 함께 나를 채우는 양식 중 하나이며, 거추장스러운 육체에서 벗어나 어린 왕자의 별까지, 그리고 고흐의 밤하늘의 별까지도 걸어가게 한다.
 

거리

빚은을 작업하며 와치 때와는 달라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은 작품과의 거리감이었다.

와치는 적극적으로 날 이야기 속에 끌어들였고, 나는 부분적으로 그들의 삶을 공유하며 때로는 그들의 자취를 쫓아 걸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나의 위치는 그들의 겹세계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빚은은 달랐다. 그들은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내게 관여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덩그러니 이야기와 동떨어진 감각이 낯설었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작업을 이어나가는 사이, 어떤 동질감이 나의 위치를 자각하게 했다. 바로 래쉬가 느끼는 외지인의 거리였다.

빚은에서 래쉬는 관찰자 및 기록자로서의 시선을 담당한다. 그가 작품과 연결되는 단 하나의 통로란 뜻이다.
나는 독자들이 그를 통해 어슨을 들여다보며 어떤 이방인의 느낌을 받길 바랐는데, 알고 보니 이야기를 그리는 나 역시도 래쉬를 통해 저 세계를 그려내는 이방인의 위치에 있었던 거다.

이로써 그간 안달해 온 거리감에 대한 고민이 한순간에 불식되었다.

1.3 작업과정

RECORD 1.3 3-6

작업 난관은 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는지, 고난과 역경이 회마다 새롭다.
1.3화의 고비는 원통형 내부구조였다. 맹세건대 나는 원통형의 건물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나선형 계단도 어려울 판에 집 전체가 둥근 형태라니. 콘티 단계의 저 성의없는 배경은 글로 써놓은 구도를 그림으로 표현할 재간이 없었던 터다.
결국 크래들 내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채우지 못하다가, 자료 수집 중 시의적절하게도 영국 버밍엄의 도서관을 발견했다. 내부의 공간감과 구조가 적당했다. 우선은 사진을 따라 그리며 감각을 익힌 뒤 겨우 셀들이 발붙일 만한 층을 그려 넣었다.

콘티▽21  밑그림,선▽178  수정▽10  색▽45.5  편집▽8
계▲262.5시간

1.2 작업과정

RECORD 1.2 2-8

1.2화의 모든 숲 칸은 밑그림 없이 바로 선을 그었다. 식물을 그리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인물 작화로 받는 압박감이 꽃과 나무를 그리면서 풀리기 때문에, 밑그림을 생략하고 식물이 저마다 얼기설기 자라는 풍경을 떠올리며 칸을 채워나갔다.
그러다보니 머릿속에 먼저 전체 풍경을 구상한 후 부분 부분을 충분히 구체화시키며 펜을 움직여야하고, 거기에 드는 시간은 상상 이상이다.

콘티▽10 밑그림,선▽239.5 수정▽7.5 색▽98.5 편집▽14
계▲369.5시간

1.1 작업과정

RECORD 1.1 1-8

콘티 단계에서 인물을 깔끔하게 그려두어 따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은 대신 건물에 시간을 쏟았다. 기본적으로 도시의 고층건물을 좋아하지 않아 거의 그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밑그림부터 삐걱댔다.
현대적인 건물 자체를 비슷하게 그려낼 수나 있을지도 미지수라고 느낄 정도였다. 코어에 참고할 만한 도시 전경 및 건물 사진과 그림들을 수집하여 구도와 느낌을 계속 봐가며 그렸기 때문에, 결국 머릿속 구상보단 현대의 건물을 짙게 반영한 칸이 되었다.
다행인 점은 건물 그림이 초가집 그림을 그릴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원래의 구상이 좀더 반영된 쪽은 1.2화의 제2지구, 제3지구의 성냥갑 같은 낮은 건물들이다.

콘티▽25 밑그림,선▽97.5 수정▽7.5 색▽23 편집▽20.5 계▲173.5시간

실상

buho

tit. 콘티부터 마무리 펜 작업까지 하는 동안 srri로부터 가장 빈번하게 들었던 평은 마을 부호인 이 사람이 짜증스럽다는 이야기였다. 그 중 하나는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으나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린 부분이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대상까지 집어낸 예리함이 꽤 재미있었다.

hnit. 주된 이유는 역시 무엇을 보느냐, 혹은 볼만한 눈을 떴느냐에 관계없이 보인 무엇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기만에 있었다. 부호에 한해선 간결하고 객관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다.

tong. 비슷한 맥락으로 확장편 이토 <通> 를 읽은 후 와치에 대해 정도를 넘어 상대를 유도하는 느낌이라 기분나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린 나의 의중은 차치하고 – 덕분에 생각의 여지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