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대본을 교정하고 원고를 편집하던 바로 어제, 다시금 고비가 찾아왔다. 이렇게 짧은 기간만에 다시 시작된 경우는 처음이고 나는 아주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1월 중반부터 2월까지

1월 중반, 처음 겪는 징후로 컨디션이 저조한 가운데 18일부터 29일까지 출혈이 10일 남짓 지속됐고, 기간 역시 전에 없이 길었던 탓인지 후유증도 심했다.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한 달 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통증이 간헐적으로 느껴졌고, 어느 밤엔 자다가 놀라서 깼다.

공백기가 길어지자 마음이 쫓겼다. 31일부터 2월 2일까지 짧게라도 누워서 책을 읽거나 엎드려서 시놉시스를 썼다. 3일, 2주 넘게 중단했던 원고를 잡았다가 3시간 만에 포기하고 이후 8일까지 얌전히 지냈다. 13일에 다시 선작업을 했다가 14일을 무력하게 보냈고, 15일에 밑색을 발랐다가 16일에 겨우 책만 두 시간 읽었다. 17일부터 19일까지 두세 시간씩 작업했다. 20일부터 23일까지 손을 놓았다. 24, 25 양일간은 다시 독서와 시놉시스, 26일부터 바로 어제인 29일까지 평균 다섯시간씩 채색을 했다.

이 모든 말들이 참 지겹고도 구태의연하다.

그럼에도 이번 고비는 확실한 인식을 남겼다. 저쪽 집에서 나가기로 한 시점부터 작은 작업방이 주어진 지금까지 최소 세 번, 문자 그대로 솜이 나를 건졌다. 내 몸이 과연 버텨낼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 두려웠던 날들조차, 적어도 생활이 비참하지 않았던 건 모두 솜 덕분이었다.
앞으로는 솜을 위해 그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나와 나의 바람보다 솜을 우선하면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읽었다. 시놉시스는 동고림 확장편인 「진홍과 주명」을 썼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저명한 오스트리아 수필가이자 소설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뛰어나고 주요한 작품에서 영화의 영감을 떠올린 앤더슨은 배경과 액자식 스토리 전달 방식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상실도 물려받았다.
문명의 파괴, 한 시대의 종말, 우리 삶이 우리가 속한 더 큰 역사에 의해 변형되는 끔찍한 방식들…
– 앤 워시번

많은 웨스 앤더슨 영화들처럼 이 영화는 상실을, 우리가 상실에 어떻게 적응하는가를, 혹은 어떻게 절대로 적응 못하는가를 다룬다.
– 매트 졸러 세이츠

종종 이 세계가 물리적 폭력에 의해, 아주 단순한 방식과 저열한 논리를 무기 삼아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Re:

다시, 시작이다.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아니 실제로는 모니터 앞에 앉았지만­― 지난 시나리오를 읽은 뒤 포스타입의 각 페이지에 올렸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혼자만의 다짐이자 간절한 바람인 글들. 언젠가, 언젠가는…

12.28

2주간 작업이 순조로웠고, 특히 목표한 시간에 가까울 만큼 작업 시간이 늘어났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양호한 상태를 유지했고, 무엇보다 할당한 시간이 실제 작업 시간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제 마감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오늘은 특별하게 여기는 날이기도 해서 원고를 꼭 올리고 싶었는데. 인생사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 연재일이 워낙 제멋대로라 날을 넘기건 말건 개의치 않는 인간으로 보일 성싶지만, 실제로는 내내 초조해 한다. 생각한 예정이 틀어지는 자체를 짜증스러워하면서도 불안정한 심신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예상보다 다섯 시간도 더 걸린 대본을 마무리하고 말칸과 효과음 단계로 넘어갔다. 내일은 이어서 남은 여섯 장을 끝낸 뒤 편집까지,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면 21-30화도 수정하고 싶다.

딸기 케이크

어젯밤에, 크리스마스라고 솜이 딸기 케이크를 사왔다. 우린 둘다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고, 딸기도 좋아한다. 케이크는 생크림에서도 딸기맛이 났고 시트보다 크림의 비율이 높았고 생딸기가 빵 위에도 사이에도 켜켜이 박혀있었다.
딸기맛 크림을 한입 가득 넣고 우물우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