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들에게는 인생은 늘 준열하였다. 가진 자에게는 인생은 유희였었다. 찰나주의, 향락주의…… 행복을 희구하는 소박한 마음은 재물로 하여, 권위와 힘에 의하여 썩는다. 그것은 생성하여 노화하고 죽음에 이르는 이치 때문일까.
(…)
소망은 먼 곳에 있고 탐욕은 가까운 곳에 있다. 탐욕은 손에 넣기 쉬워도 진실은 잡기 어렵다. 해서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맑은 물줄기에서 탈락한다. 숫자만 기억하고 숫자만 믿으려 한다. 숫자는 질이 아니다. 양이다.
/ 토지 4부 2권 337p
토지
2-200
천지 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음으로 하여 생명이 존재한다고들 하고 탄생은 무덤에 박히는 새로운 팻말의 하나라고들 하고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집념은 율동이며 전개이며 결실이라고들 하고, 초목과 금수와 충류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들 한다.
…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잇는 그동안을 집념의 조화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뒤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 희극배우, 웃음 참는 비극배우의 일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 토지 1부 2권, 박경리
서문, 2001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은 석연찮다. 자기연민이랄까, 자조적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 토지, 박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