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점

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인물은 선천적이든 다른 상황 탓이든, 그 성격의 근저에 거의 의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압도적인 우울함이 숨어 있지만, 그것도 그 인물의 가치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비극적으로 위대한 인물은 병적인 우울함을 통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야망을 품은 젊은이들이여, 명심하라. 인간의 위대함이란 질병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 모비딕, 허먼 멜빌

모비딕

WHALE: 스웨덴어와 덴마크어로는 hval. 이 동물의 몸체가 둥그렇고 뒹굴기를 잘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덴마크어로 hvalt는 ‘아치 모양’이나 ‘둥근 천장 모양’을 뜻하기 때문이다.
­― 웹스터 사전

WHALE: 좀 더 직접적으로는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의 Wallen에서 유래함. 앵글로색슨어의 Walw-ian은 ‘굴리다, 뒹굴다’라는 뜻이다.
­― 리처드슨 사전

/ 모비딕, 허먼 멜빌

모닝 루틴

밤 10시 반에서 12시 사이에 눕고, 아침 5시 45분에서 7시 사이에 기상한다. 비교적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패턴이 자리 잡은지도 꽤 되었다.
5시 45분은 오전 일정이 뒤로 밀리지 않는 최적의 시간이다. 7시에 깨면 책 읽는 시간을 아침 먹은 뒤로 넘겨야 한다. 8시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거고, 9시는 전날 새벽 2시 이후에 잠들었거나 어디가 아픈 거다.
취침 시간은 평균 7시간. 이쯤 자면 알아서 깨기 때문에 알람은 따로 맞추지 않는다.

깨고 나서 15분 정도는 눈을 감고 멀뚱히 누워 있는다. 꿈을 기억하는 날은 대개 기분이 저조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가볍게 팔다리와 등허리, 굳은 목 근육을 풀어준다. 가장 시원한 동작은 견상 자세. 어깨와 등, 다리 뒤쪽이 쭉 펴진다.
땀을 식히는 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당면한 고민들에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본다.
따뜻한 물, 차가운 물 순으로 끼얹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책상 앞에 앉으면 개운하고 나른하다.

책을 읽는다. 모비딕 다섯 쪽, 파이 이야기 다섯 쪽, 초록 지붕 집의 앤 다섯 쪽.
일과를 오후, 저녁으로 구분지어 정리한다.
아침 일기가 밤에 쓰는 일기보다 오히려 중요하다. 주로 새벽 시간에 무분별한 심상을 걸러내고, 저녁이 되면 그날의 작업 진행률과 다음 날 보충해야 할 부분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책을 돌려 읽듯이 그림도 돌아가며 그린다. 걸어가는 펭귄을 하나 그리다 말고 한옥 처마를, 다시 쪼개진 자몽을.
식사 시간은 오전 10시와 오후 4시. 저녁 6시 이후로는 거의 먹지 않는다.

8과 31분의 28

생산적인 하반기를 보내고 싶다. 포스트도 빈도를 약간 늘리고 싶은데 늘 비슷한 이유로 서두를 떼기가 어렵다.

이달의 책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남자네 집, 모비 딕.
모비 딕은 5분의 1가량 읽었다. 작품 내에서 포경에 나서는 배 피쿼드의 일등항해사 이름이 스타벅인데, 미국의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가 바로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신기해라.
자칫 장황하게 느껴지는 문체도 매력적이다. 화자의 지식과 상식의 범위, 시대적 편견, 생활사와 인생관 같은 정보들이 방대하게 제공되다 보니 마치 자전 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이다.

이달의 앨범은 Meghan Trainor의 Timeless. 발랄한 팝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들어보세요. Been Like This, Whoops, I Wanna Thank Me, Bite Me는 멜로디가 통통 튀고 Crowded Room은 목소리 톤에서 설렘이 느껴져요.

8과 31분의 8

한 차례 날렸던 개인페이지를 다시 건져 올리기로 결심한 이유는 (물론 첫째로는 여건이 되어서고) 이 공간이 한원과 나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이자 분리의 기록이며 해체의 흔적인 탓이다.

1년 전에는 별수 없다고 여겼고 실제로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1년 후는 또 어떨는지 모르지만, 어떻대도 괜찮다. 불과 몇 달 전의 나는 내 삶이 올해야말로 갱신되지 않으려는 줄 알았으니까.
이즈음엔 그냥, 이날 이때 가능하다면 저질러 놓고 보자 싶다.

8과 31분의 3

3일, 도메인을 새로 구입했다.
6일, 호스팅 서비스를 새로 신청하고 데이터를 백업해 개인페이지를 복구했다.

지난 도메인과 호스팅이 만료되면서 데이터가 완전히 날아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말끔하게 초기화된 관리자 패널을 마주하니 맥이 풀렸다. 그게 마치 지금의 내 처지 같기도 해서, 이미 적기를 놓친 일, 손에서 놓아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워드프레스의 백업 플러그인은 그깟 감상보다 유능했고, 서비스 중단으로 이제는 검색조차 되지 않는 테마며 수년간 자잘하게 수정을 거듭한 CSS와 설치 플러그인 설정까지 모조리 불러들였다.

이럭저럭 말끔하니, 아무 일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돌아왔다.

하늘을 딛으면 굳은 슬픔이 풀어질 거야

오늘의 곡은 데이먼스 이어(Damons year)의 샛별.
몇몇 곡의 가사가 자꾸 나를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얼마 못 듣고 지웠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Mondegreen, HEADACHE., ‘ sin ! ’ 앨범 전곡이 다 좋고 특히 Blanche – salty – gestalt – pink pill (w100) – Scarlett – 샛별 순으로 들으면 꼭 지나간 나의 시간이 내 것이 아닌 목소리로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8과 31분의 28

종이꽃 확장편, 와치의 장막 1~12p 밑그림 배치를 일단 마쳤다. 콘티는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수일 가량 간격을 두고 수십 번을 다시 읽으면서 대사와 구도를 수정하고 드물게는 칸이나 페이지 순서를 바꾸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달리 걸리는 부분이 없어서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교집합 (5)

이렇듯 삶과 작품이 교차하면서 남기는 흔적­― 그림 위로 비치는 인영을, 때때로 밀려드는 동질감과 일체감을 나는 기록해 두고 싶었다. 창작자의 비루한 생활과 그가 경험하는 놀라운 그림의 세계는 어떤지 나누고도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 관심이 있다면 찾아 읽을 수 있도록 적당한 접근성을 고려해 이 공간을 개설했다.
즉 개인 페이지는 나와 한원 사이로 어중간하게 걸친 영역이기에, 경계 너머 사적인 이야기는 되도록 언급을 피했고 여의치 않은 경우 에둘러 적었다.

이 경계선이 조금씩 확실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한 건, 내가 내 인생 전반에 걸쳐진 오랜 고민의 답을 일부 인정하고부터다.
부분집합이 전체집합의 중앙을 떠돌건 가장자리에 붙었건 그 부분집합의 모든 원소는 전체집합에 속한다. 혹시 내가 내게 속한 원소 일부를 바깥으로 밀어낸다면 그 밀려난 원소는 나의 여집합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와 같이 전체집합에 속해 있을 것이다.
고집스레 교집합을 주장하며 구분 짓는다 해도, 작가 한원에게 속한 전부가 결국은 본체의 부분집합일 뿐이듯이.

(2021년에 교집합이란 제목을 달고 써 올린 네 개의 글은 맺음말이 누락된 미완의 것이었다. 문장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길래 방치했다가 그대로 잊혔던 해묵은 단락을 뒤늦게나마 털어놓는다.)

주저리 (소식)

3월에 시작한 소식은 놀랍게도 여전히 유지 중이다.
체중은 4킬로가 줄어 몸이 더 가벼워졌고, 근육에 덮여있지 않은 뼈도 조금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딱딱한 부분을 손으로 쓸면서 이게 어디로 연결되는지, 어떻게 움직이면 쏙 들어갔다 다시 불거지는지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빗장뼈의 모양, 바로 아래 움푹하게 들어간 부위의 여러 굴곡, 아래쪽 늑골과 도드라지는 손등 발등 뼈, 골반 양쪽 측면과 무릎 안쪽 뼈와 복사뼈…. 바깥 복사뼈는 생각보다 두껍게 잡히고, 무릎 안쪽 뼈는 자기들끼리 부딪히고도 꽤 아프다.

뭐가 뭔지

오늘의 곡은 권진아 님의 뭔가 잘못됐어.
사랑에 빠지는 순간순간을, 이제까지 내가 알아 온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고 무너져 내린 다음 재구성된다고 표현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특히 옳은 건 다 틀린 게 된다는 구절이 좋고, 온통 뒤죽박죽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세상을 노래하는 곡 제목이 뭔가 잘못됐어, 인 것도 참 귀엽다.

주저리 (피치)

무영과 청영 마지막 화는 디지털 작업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중단됐다. 달의 결영도 마찬가지고…. 피치가 오르던 차에 붕 떠버려서 어라,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종이꽃 확장편 콘티로 넘어가서 1-30 콘티를 끝냈고 시놉시스도 일단락 지었다.
와치 콘티를 새로 짜기는 오랜만이라 또 얼마나 헤맬까 싶었는데, 머릿속으로 오래 상상했던 장면들이어서 그런지 비교적 구성이 수월했다.

주저리 (헛소리)

우는 소리는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내 글에 내가 질리는 기분이 들어서 뭔가 가볍고 즐거운 얘기를, 우스갯소리 같은 걸 적어보고 싶었는데­― 달이 넘어가도록 한 문단은커녕 한 문장조차 끄집어낼 수 없었다고 한다.

기상

요즘 기상 시간을 5시 45분에 맞추느라 어지간하면 저녁 10시 반에 눕는데, 3시 언저리에 번번이 눈이 떠진다. 잠이 얕은 것도 같고 온도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솜은 너무 더워하고 에어컨을 켜면 내가 너무 추워하고.
오늘은 4시에 깼다. 다시 잠들겠거니 싶어 버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일어나서 글이라도 쓸걸.

6과 30분의 25

무영과 청영 25-33 원고가 선 단계 완성까지 딱 두 칸 남았다. 대체 밑그림을 몇 차례나 갈아엎었는지 모르겠다. 한 페이지 전체를 새로 그렸다가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처음 것을 다시 수정했다가, 영 안 되겠는 자세에 또 따로 연습했다가. 전례 없는 번아웃까지 덮친 바람에 마감이 요원했다.
꼬박 1년 반을 넘기고 겨우 라이트 박스에 원고를 올렸을 땐 좀 겁이 났었다.

머리카락이 뒷덜미에 쓸리는 길이를 넘어 꽁지로 묶일 정도가 되었다. 왜인지 전에, 와치를 연재할 당시 헤어샵에 가지 않고 집에서 내키는 대로 숭덩숭덩 자르곤 했던 일이 떠올랐다. 외국에 체류했을 적에 내내 그렇게 지냈던 일도. 이제는 그리 막무가내일 수 없어서 앞머리와 옆머리를 다듬는 것으로 성가심을 약간 해소했다.

6.25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 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개정판), 박완서 저.

회복

유일한 재능은 솔방울과 퓨마를 그리는 사이에 완전히 돌아왔다. 잠들기 전에 내일은 이거랑 이거 마저 그려야지, 하고 빨리 내일 되면 좋겠다, 보채듯이 들뜨기는 오랜만이라 한편으론 감격적이었다.
달의 결영 원고를 재개하고 헤매는 와중에도 재밌고 즐거웠다. 다음 화 콘티도 순조롭고 시놉시스는 색다르다.
와치는 이젤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밑그림과 밑선을, 일부는 밑색을 바르는 중이다.

4와 30분의 1

3월에 글을 아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쓰는 족족 위아래가 잘 붙질 않고 부풀어서 속이 빈 느낌이라 결국 다듬기도 포기해 버렸다.

달의 결영 1화를 마감했다. 무려 1년 만에. 미쳤나 봐…. 러프한 작화, 중편 분량, 완결을 최소 목표로 시작했는데 이 러프한 작화부터 막혀서는 내 기준의 러프가 밑그림이냐 밑선이냐가 결정되기까지 여러 장을 이 느낌 저 느낌으로 반복해서 그려야 했다.
시작하기 전만 해도 러프를 약간 신경 써서 그린 콘티, 콘티와 밑그림 사이 단계 정도로 어림잡았다가 막상 그려보니 업로드를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결국 내 러프는 선 직전 단계를 말한다고 선언하고야 작화 스타일이 정해졌다.

이런 게 바로 꾸안꾸인가 보다. 안꾸는 남이 보기에 안꾸인 거고 나는 열과 성을 다해 꾸며야지만 얻는 룩…. (헛소리)
개인적으로 옷차림은 단정하면 됐다는 주의다. 검정 무지 맨투맨, 검정 조거 팬츠, 검정 피시테일 숏파카, 검정 스포츠화가 스탠더드인 단벌치기. 외출복 고민하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절식

천천히 식사량을 줄여서 3월의 1주는 허기만 달랠 정도로 절식을, 최근 2주간은 소식을 했다. 원래가 입이 짧은 편이고 음식이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아서 적당한 결심과 의지로 시작했는데 웬걸, 공복에 일하기는 생각보다 사람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생으로 굶지도 않았건만.